November 13, 2012

원시청정-- 견해(2)




원인승의 견해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은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이다...
나가르쥬나가 가르친 귀류논증과 찬드라끼르띠가 가르친 귀류논증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찬드라끼르띠는 공성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모든 것은 일체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다르마다뚜(법성)의 견해를 가르쳤다..
반면 나가르쥬나는 현상과 공성의 결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찬드라끼르띠의 가르침이  말하는 공성에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찬드라끼르띠는 공성을 강조하고...나가르쥬나는 현상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두 요소의 상호불가분성(현공불이)을 이해하게 된다...
찬드라끼르띠의 견해.. 중론을 포함한 나가르쥬나의 여섯가지 저작에 있는 견해는
부처님의 세가지 법륜 가운데..이전법륜을 드러낸다...

나가르쥬나는 두번째 부처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부처님의 견해를 모두 설명하는 저작들을 남겼다...
인도의 6장엄과 2지존은...
나가르쥬나의 논서와 부처님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가르쥬나의 논서는 부처님의 세 가지 법륜을 모두 다룬다..
보행왕정론을 포함한 일곱가지 땀쪽(교훈집)은 초전법륜을...
중론..회쟁론을 포함한 여섯가지 논증은 이전법륜을..
네가지 찬가로 구성된 예찬은 삼전법륜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속전(Tantra)인 구햐싸마자에 대한 주해도 남겼다...

이와같이... 7보장과 같은 변지`롱첸랍잠의 저술을 보면...
모든 가르침의 모든 형태가 빠짐없이 발견된다...
7보장에는 부처님의 8만4천법문이 있고..
3백 6십가지 외도의 견해가 있고...
족첸의 원시청정과 자재광의 무분별로 결론을 내린다...
7보장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있다..

3백 6십가지 외도의 가르침은 불법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외도의 견해와... 불법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지 극단과 중관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지 극단에 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중관의 궁극적인 견해를 알 수 있고...
나아가..족첸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

닝마의 대스승 중에.. 롱솜 빤디따(Rongzom Pandita)라는 분이 계셨다...
아띠샤께서.. 인도의 대성취자 크리시나차리야의 환생자라고 지목했던 인물이다..
그는 주로 원시청정의 대공성을 수행하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거의 공성의 측면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롱(Rong) 롱(Long)``이라 말하면...
변지 롱솜 빤디따와 롱첸랍잠을 가리키는 것이다...
닝마전승의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 같다...

롱첸랍잠은 현상과 공성의 결합을 주로 얘기했다...
세가지 법륜과 경전과 속전 전체에서..
롱첸랍잠의 7보장과 나가르쥬나의 가르침에 있는 견해는 서로 일치하여 구분이 안된다...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롱첸빠를 이렇게 평가한다...

``님의 마음은
잠부디빠의 6장엄과 2지존이 얻은 자비와 학식과 깨달음 전부를 갖추셨습니다...``

롱첸랍잠이라하는 사람은 티벳에 태어나서...경전과 속전..그 외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그는 싸라스와띠와 따라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고..
족첸의 가르침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비말라미뜨라의 환생자이다...
지금...족첸의 궁극적인 견해는 롱첸랍잠이라는 이름을 통해 지적되고 있다..
롱첸이라는 말을 통해 원시청정을 이해하고...
랍잠이라는 말을 통해 자재광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견해는 롱첸랍잠이다..라고 말할 때..이것은 족첸의 견해를 가리키는 것이며..
원시청정과 자재광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둘의 결합은... 부처의 법신과 색신의 결합을 의미한다...


스승의 구결이 말하는 궁극적인 견해는 롱첸랍잠이다..
그 견해는 외부에 있는 어떤것이 아니다...
견해가 외부에 있는 것이라면.. 안에있는 무명을 잘라낼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근본 성품..여래장을 닦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무엇과 같은가?
공성.. 어떤 현상적인 모습도 없는 성품을 아는 것이....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 내재된 텅빈 성품을 자각할 때.. 자비를 구할 필요가 없다...
대자비는..텅빈 본성속에 이미 편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자를 향해 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심은 고통을 보아야지만 일어난다... 고통을 보지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자비는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비는 본래부터 갖추어져있고 모든 사물에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자발적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향해 그냥 일어난다...
공성의 자각속에서
중생이 무명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것이 효과적인 방법인지도 알게 된다...
공성의 자각속에서 어떻게 해줄지를 아는 것과 자비는 다르지 않다...
이름만 다를 뿐이다...

``명상은 켄쩨 외쎄르이다...``

공성과 자비의 무분별을 이해하고 체득하였을 때...진정으로 공성을 자각하게 된다...
견도에 들었을 때...여래장의 근본성품을 비로서 깨닫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깨달음이 크게 자라게 된다..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있을 때...궁극적인보리심이 안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 보리심이 자라났을 때...사람은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
이것을 자각한 명상수행자가...비민의 마음으로 가득해서...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 모든 중생을...부처의 경지에 이끌어주려 할 때...
그가 행하는 것이 무엇이든...
눈을 깜박이거나 팔을 펴고 굽히는 것마저도...중생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중생을 돕기도 했다...안했다 하는 그런식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그 일이 일어난다...
타이밍이 너무 이르거나 늦는 법도 없다...
말한 그대로다...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보살의 행위는 완성되는 법이다...

``행위는 승리자의 아들..갤외 뉴구이다...``

처음에는.. 견해.. 명상,.. 행위가 이해되어야 한다...
중간에는 그것이 수행되어야 한다..
나중에는 그 수행의 열매로.. 몸과 말과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견해..명상..행위가 이름은 달라도...본질적으로는 하나이다...
어느 누구의 마음 속에서도 그것은 나뉠 수 없다..

누구가가 공성을 자각하면...
한 생에 부처에 도달하리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된다...
어떤 가르침이 완벽하게 의심을 넘어선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족첸의 가르침이다...
어떻게해서..족첸의 견해 한조각을 깨달았다고 모든 존재가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을까?
공성을 깨달으면... 사람은 세속팔풍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거기엔 희망이랄 것도 염려랄 것도 없다...
공성의 견해를 조금만 깨달아도...
사람의 마음은 세속적인 방일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방일이란...대양에 이는 거친 파도와 같은 것이다....
점차적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본성에 적응이 되아야만 한다..

예를들면...1지에 도달한 보살은..원하기만 하면...
7일 안에 부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사라가 텅 비워졌을 때 부처에 도달하기로 맘 먹을 수도 있다...
사람이 공성의 궁극적인 견해를 깨닫기 시작할 때...그렇게 할 수가 있다...
공성의 견해를 충분히 깨달을 때..
상사라의 현상속에서 고의 진리를 실제로 보게되더라도...
그것은 그저 실체가 비어있는 홀로그램과 같은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그것은 무지개와 같다...
그게 하늘에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상사라와 니르바나에 있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고..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을...
족첸의 견해 속에서 근심걱정없이.. 편안하게 머무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내면에서 편안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람은 상대적으로만 진실인 무명의 모습과..
무명에서 벗어난 궁극적인 진리가 어울려 놀고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세 구절은..정곡을 찌르는 세 마디 말 속에  있는 세 마디 말이다...
견해를 깨닫는 방법과 관련하여....
원인승에서는..위에서 설명했던것처럼...
학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견해를 받아들여..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을 한다...
그들은 인용과 논증을 통해 그것을 이해한다...
한번 이해를 하게되면... 궁극적인 본성에 대한 견해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가르침을 받았으면.. 그것을 듣고...되새기고.. 명상해야만 한다...

처음에는...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에 귀기울이고...
중간에는...이해될때까지..들은것의 의미를 깊이 사유해야 하며...
마지막엔...명상을 통해.. 사유한 바가 의미하는 것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만.. 원인승과는 다르게...
인용과 논증으로는 족첸의 견해를 명료하게 할 수 없다...
족첸의 견해에 확신을 얻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분석적 명상을 하는 학자의 길...
모든 것을 있는그대로 내버려 두는 은자의 길....

학자의 길에서는..
인용과 논증과 구결을 통해 족첸가르침의 의미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구결은...롱첸랍잠의 7보장에서.. 한부분은 폭넓게 설명되어 있고...
다른 한부분은 깊이있게 설명되어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분석적명상을 하는 학자의 길이다...

있는그대로 모든 것을 내버려두는 은자의 길을 위해...
비마닝틱...칸도닝틱과 같은 족첸의 핵심구결이 있다...
이와같은 명상 핵심구결이 수행될 수 있도록...살아있는 체험에서 나온 말이 주어진다...
다섯가지 학문에 관한 지식이 없더라도...
이 구결을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적용한다면...성취를 얻을 것이다...
족첸은 가장 깊고.. 가장 광대한 가르침이므로...즉시..번뇌의 어둠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
스승이 부처님으로 보이거나..법신 자체로 보인다면...족첸의 견해를 깨달을 것이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내버려 두는 은자의 길이다...

이러한 오탁악세에는...수명이 짧고...질병은 늘어난다...
정진의 힘은 약하고...쉽게 흔들리며...세속잡사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최상의 구결 중의 핵심인 이것...정곡을 찌르는 세마디 말...
천신마저도 되살릴수 있는 감로법문이 설해졌으니.....
그 의미는 명상을 통해 체험될 것이고...
다양한 극단을 가진 견해들은 모두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명상을 수행할 때는..견해의 의미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어디에 있는가?
극단에서 벗어난 궁극적인 견해는.. 멀리있는 것이나 광경같은 것이 아니어서..
바깥쪽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미혹된 현재 마음을 알아차릴 때...견해는 원시청정의 대공성으로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본연의 상태로 놓아두어라..
마음의 본성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상념이라는 미혹의 파도에 떠밀려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습관을 따르고..미래에 대한 생각을 따르느라..이 순간의 자각을 놓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미혹의 파도를 멈추겠는가?
무명의 파도가 일어날 때...견해의 핵심을 알고있다면...
사변적인 학습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견해를 깨닫기 위해...공덕을 쌓거나 장애를 없앨 필요도 없다...

우리는 무명의 파도가 견해를 가리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무명의 파도를 살필줄 안다면...그것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나..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비롯된 원인도 없고... 차지한 공간도 없으니...사라질 것도 없다..

핵심구결이 가지고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명상을 통해 견해를 깨닫고자 한다면...
그리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왜 그럴까?
무명의 파도에 휩쓸려 있는동안...
본연의 마음상태에 집중하면서 강하게 `팻~!`하고 소리지르면..상념은 흩어지게 될 것이다..
수미산만큼이나 큰 모래더미라도.. 태풍을 맞으면 금새 흩어지고 말 것이다...
`팻~!`하고 소리 지르는 것은 그와 같다...

그렇게 소리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혜와 방편이 결합된 지혜를 의미한다..
그것은 숲 전체를 베어내는 날카로운 도구와 같다...
무엇을 잘라내는가?
과거의 무지 뒤에는 또 다른 무지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다른 무지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염주에 꿰어진 염주알과 같아서...
줄이 끊어지면.. 염주알은 모두 흩어지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혹된 상념에다가 팻~!하고 소리지르면...
미혹된 상념은 끊어져 흩어지게 된다..
그 때.. 그대로 드러난 본연의 그 상태를 들여다 보라...
마음은 모습도 색깔도 질료도 없지만...
어떤 인식이 본성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꾸밈이 없는 본연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견해는 롱첸랍잠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무명의 파도를 잘라내기 위해...
강력하고 짧고 날카롭게 팻~!하는 소리를 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상대적 진리의 거짓말에 속고있다...
그 거짓말은 팻~!으로 잘라낼 수 있다..
그것은 자체 발광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본성을 자각했을 때...
`오호라..이것이 바로 꾸밈이 없는 법성의 모습이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본성에서 올라오는 현상.. 즉 상념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과 같다...
`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이야~~`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답이 풀리는데... 이것을 두고 견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곡을 찌르는 세마디 중 첫번째 정곡이다...

명상체험을 통해 견해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려면...
과거의 생각을 따라서도 안되고...미래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된다...
마음의 동요없이...지금이순간의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신심이나 헌신..자비와 같은 것인지...
탐욕이나 분노..무지에 속한 것인지 생각할 것 없이...
꾸밈이 없는 본연의 상태에 머무르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흙탕물은 휘저으면 맑아질 수 없다...
그러나 있는그대로 내버려두면...맑아질 것이다...
꾸밈없는 마음이 충분히 각성되면... 꾸미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일체 함이없이 머무를 때...
마음의 본연의 상태가 감각적 대상으로 인지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게 바로 그거야~라고 말할수는 있다..
하나의 대상으로 붙잡을 수는 없을지라도... 이리저리 궁리하지만 않는다면..
마음의 본연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각의 상태로 꾸미려는 노력없이 머무른다면...
그러한 자각은 좀 더 분명해지고...미혹된 마음은 이윽고 사라질 것이다...
그때 근본스승에 대한 신심과 헌신의 도움을 받아...마음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본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안에 있는 견해가 자신에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승의 가피로.. 저 어디에선가 불쑥 생겨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전에는 없었는데...새로 얻게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보석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기 집 마루 밑에서..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궁핍함이 사라졌다고 확신하게 해줄 것이다...
본성을 자각하는 그러한 상태에 머무는 것..
이것은 족첸의 견해를 간결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므로...그러한 상태로 인위적인 노력없이 머물러야만 한다...

November 1, 2012

원시청정-- 견해


세 마디 말 중 첫 마디는 견해이다..
견해를 얻지못하면... 명상도 행위도 있을 수 없다..
견해를 가진자는 핵심적인 자산를 가진 자와 같다... 어마한 금이나 다이아몬드같은...
세상에서 하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재산도 없는 거지는  부자가 되는 상상만 해 볼 뿐이지..
실제로 부를 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바른 견해를 갖지 않는 이상... 일체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눈이 없으면...귀가 있고..혀..코..등이 다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견해는 눈과 같다...
오류없이 깨달은것이 아니고... 단지 상상하기만 하는 것은
견성과 성불의 길에 들어서게 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견해가 아니다...
수행을 통해...나은 존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견해를 얻으면... 구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구경의 경지란 일체지를 말하는 것이다...
일체지에 도달하는 것은 견해를 아는 것에 있다...
견해를 획득하게 하려고...
부처님은 여러 수준의 견해를 제시하셨다...
성문승에서...아띠승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 견해를 제시했다고 해도...
각자는.. 이러한 견해들을 조사해보아야 한다...
광대한지 아닌지... 깊은지 아닌지...구경의 견해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사해봄으로서...궁극적인 견해가 무엇이지를 찾아보면...
족첸이 그 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족첸의 궁극적인 견해는 부처님의 명상을 통해 얻는 지혜이다...
싸꺄 빤디따께서 말씀하셨다..

``아띠요가의 견해는 가르침의 차제에서 얻는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지적인 작업을 통해 얻어지는 견해가 아니다...``

이것은 도과...부처님의 지혜를 바로 깨닫는 것이며..
고귀한자..보살이 자기 스스로 알아차리는 지혜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스스로 알아차리는 지혜의 세계라 알려져있다.
세존..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감로와 같은 다르마를 찾아냈으니..
매우 깊고..개념을 초월해있고.. 어떤 조건에 의해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것을 보여주더라도...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니...
나는 그저.. 숲으로들어가 아무 말없이 살아가리라...

글이나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부처님은 명상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 가운데 견해에 관한 부분은...족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족첸의 견해는 언어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말로 지적할 수가 없으며..
마음의 작용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것은 조금도..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족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도 말과 생각과 표현을 넘어서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승한 방편을 써서... 자비심에서...
부처님은 하늘에 빗대어 견해의 텅 비어있는 성품을 이야기 하셨고..
태양과 달에 빗대어 명징한 성품을 이야기 하셨고..
햇빛과 달빛에 빗대어 상사라 열반 전체에 편만해있는 성품을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비유를 요약하면...
견해는 바른 문사수(聞思修)의 목적이다...
들음으로 견해가 이해되고...
사유함으로  체험이 일어난다...
명상을하면.. 견해는 점차 오류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하지않고  덮어놓고..``이것이 견해다.``라고 생각하면...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금은 달구어서 깍아내고 문질러야하는 것처럼...
나의 가르침은 잘 따져보아야만 할 것이다..
공경한다는 이유로.. 그냥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용을 하고 논리를 적용하여 분석해볼수록..
심오하고 광대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가르침을 더욱더 신뢰하고 확신하지 않을수가 없게 된다..
그와는 달리...다른 승의 견해나... 외도의 견해...특히 기독교의 견해는
아무리 애써 설명한다 하더라도.. 더 심오해지거나 광대해지지 않는다...
다른 견해는 이런식으로 한다고해도 심오해지지 않는다...
모든 견해는 그 깊이를  따져 볼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족첸의 가르침이 불교의 궁극적인 견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9부승의 나머지 여덟가지 견해는  족첸의 견해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일까?
어느 하나도 그렇지 않다..
첫번째로.. 성문승의 견해...무상에 바탕을 둔 고통의 진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무상은 공성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공성의 특성은 족첸에서.. 분명하게  자세하고 완벽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성문승이 공성의 원리를 전혀 가르치지않는다는 표현은 맞지가 않다...
가르치지 않는다는게 사실이라면...
성문승은 번뇌를 제거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공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공성에 관한 좀 더 세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절반을 이해하는 사람은 절반만 가르치고...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조금만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하다보면...점차적으로 궁극적인 견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동에서 오는 사람.. 남에서 오는 사람..서에서 오는 사람.. 북에서 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걸어서 오고..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오고..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오고..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온다..
모두 같은 장소에 도착하지만... 도착하는 속도는 다르다...
속도는 견해에 달려있다..
견해가 바르게 자리잡아야 한다...
그러면...명상과 행위가 견해확립을 도울 것이다..
견해가 바로 자리잡으면.. 명상과 행위는 큰 어려움 없이 진척될 것이다...

어떤 말은...근본스승의 견해가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들어..쌍게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붓다를 티벳말로 옮긴 것이다...
쌍은 깨어남..무명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계는 피어남..모든 사물에 대한 두가지 지식의 지혜가 연꽃처럼 피어남을 의미한다...
이 두 음절은...두가지 장애를 버리는 것과...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게다가...10지에 오른 보살은 사상을 초월하는 지혜의 공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가지 버리는 것과 두가지 얻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 공덕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방식으로...족첸의 견해는 이와같이 설명된다...

견해는 롱첸 랍잠이다...

가리키고있는 사실과 관련하여... 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네가지 착시...네가지 극단을  소멸시키는 견해...즉 롱첸랍잠을 의미한다...
이것은 족첸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깨닫는 것..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이름과 관련하여...
싸만따바드라의 깨달음...6백4십만 족첸딴뜨라의 지혜를 체계화시킨자는 변지 롱첸랍잠이다...
이름과 가르침이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람과 가르침이 하나가 되면..
그 사람이 족첸이고..그가 가르친 가르침도 족첸이다...

어째서 그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는가?
가르침의 광대한 의미는 성현의 마음의 세계에 속한 것이어서..
속인이 언변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수행은.. 구루의 전수에 의지하는 것이다...
스승의 요결은...수행하기 쉽고..별 어려움없이 이해가 가능하다...
부처님의 견해를 깨닫는 가장 쉬운 길은.. 요결에 의지하는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세마디 말에 대한 요결은...
견해는 롱첸랍잠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견해는 롱첸랍잠이다..라는 이 말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 견해를 지적하고 있는 스승은...변지 롱첸랍잠이다...
변지 롱첸랍잠은...족첸의 세가지 형태가 가진 견해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위해...일곱가지 보장(죄뒨)..자휴식 3부론(~ㄹ알소꼬르숨)..
자해탈 3부론(랑될 꼬르숨)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언어로 설명된 가르침이다...
변지 롱첸랍잠은.. 그의 지혜 마음을  떼르첸 라뜨나 링빠... 오르겐 떼르닥 링빠..
라쮠 남카직메...릭진 직메링빠...잠양켄쩨왕뽀...잠괸꽁뛸로되타예.. 잠양 켄쩨 최끼로되..에게 전수하였다...
그가 그의 마음의 가피를 이들에게 전했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자의 마음전승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승리자의 마음전승이 지닌 구경의 의미를 배웠을 때...
지명 직메링빠는 롱첸랍잠이 주는 세가지 계시를 체험하였다...
첫번째로...그는 육신의 가피를 받았다..
두번째로.. 그는 언어의 가피를 받았다..
세번째로.. 그는 마음의 가피를 받았다...
변지 롱첸랍잠은  여래처럼 매우 아름답고..평화로운 인도 빤디따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러한 육신..언어..마음의 가피를 전수하였다..

직메링빠의 첫번째 계시에서... 롱첸랍잠은 다소 늙은 모습이었다...
두번째 계시에서...롱첸랍잠은 그에게 7보장의 숨은 의미를 담고있는 책을 건네주었다...
롱첸랍잠이 그책이 무슨 내용인지를 말하고 있을 때...
롱첸랍잠은 자신의 심상속을 직메링빠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외적인 스승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내적인 스승과 관련해서는...
세번째 계시가 있은 뒤에.. 직메링빠는 자체에서 드러난 족첸의 견해..롱첸랍잠은..
외적인 빤디따가 아님을 깨달았다...

내적인 자각의 본성이...롱첸랍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자각이 강하다면... 장애는 소멸하고..청정한 바탕이 드러날 것이다...
한꺼번에.. 롱첸랍잠에 대한 깨달음을 가르치고 싶다면...그렇게 할수도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경의 깨달음이다...

족첸의 견해는... 가리키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설명되어야 한다...
변지 직메링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 바람직한 모습을 취할 때... 스승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람직한 모습을 취하고.. 그 안에 다르마가 자리잡고있다면..
스승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관정을 주고.. 구전을 하고.. 구결을 전하는 스승..
우리가 보는 모습이나.. 듣는 목소리..장애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 스승들은...모두 외적인 스승들이며..
내적인 스승과 교감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한다...
이 스승들은...관정을 주고.. 구전을 하고.. 구결을 전하고.. 성불의 길을 지적해주므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가르침을 듣고.. 되새기고.. 명상한다면...
실제로 자기 안에 내재된 본성인..불성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때...우리에게 다르마를 가르쳐 준 스승은
더 이상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어디가 안인가?
구루는 마음의 본성이다...
우리가 한번 마음의 본성을 깨달으면... 바깥에서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다..
마음의 견해가..명상속에서도 명상을 멈춘 일상의 순간에서도 유지된다면...
스승은 오고 감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할 것이다...


외적인 스승이 요결을 드러낼 때..
족첸의 견해..명상..행위의 정곡에 점차 접근하게 된다...
세가지 핵심가운데.. 견해를 지적하려면..롱첸이 의미하는 바를 말할 필요가 있다..
롱..은 광대함을  의미한다..
거리개념으로 공간을 계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간은 광대하고.. 그 특성은 비어있다..
무한하게 넓고...특성이 없으므로... 공간은 견해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그 안에는.. 그 안에 담겨있는 세상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세상은 그 바탕이 무엇인가?
그 바탕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
이 때... 공간과 세상을 담고있는 그 내용물이 같은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특성을 구분하든 하지않든...
공간은 그 모든 것의 바탕이다...
세상과... 세상을 채우고 있는 현상은 그 바탕이 공간이다...
이처럼 생각하면서..
우리는 롱첸이라는 단어를 뭔가 광대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롱은 무엇인가?
족첸에 따르면... 그것은 견해의 비어있는 특성.. 원시청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럼 랍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량없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잠부디빠(남섬부주)에 있는 모든 숲의 나무를 헤아리려 한다치자...
평생 공을 들인다하더라도...셈을 마칠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상사라..니르바나의 현상은...
바탕으로... 원시청정의 텅빈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스깐다(온).. 다뚜(계)..아야따나(처)와 같은 상사라적 현상..
까야(신).. 갸나(지)와 같은 니르바나적 현상은.. 랍잠이라 한다...

상사라와 니르바나의 현상은...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업과 장애의 상사라적인 현상은...원시청정의 대공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처의 신체와 지혜라는 모든 니르바나적인 현상은...
원시청정의 대공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까르마와 번뇌라는 상사라적인 현상이 원시청정의 대공성과 같은 거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같지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까르마와 번뇌와 같은 상사라의 현상은 혼동과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번뇌로 인해... 탐욕..진애..무지와 같은 까르마가 일어나고...
육도환생의 고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원시청정의 대공성 속에는..고통이라는 이름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시청정의 대공성을 깨달은 자는..
상사라의 현상을 그 자체만의 존재성이 없는 그림자나..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보게된다...

어떠한 방식으로...
부처의 신체와 지혜라는 니르바나적인 현상은 원시청정의 대공성에 바탕을 두고있는가?
그 본성은 같은 것이다...
부처의 신체와 지혜는 원시청정의 대공성 속에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그 두가지는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원시청정의 대공성과 관련을 갖고 있지만..
부처의 성품을 설명하기 위해... 32상호와 80종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32상호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하나하나가 실재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육계는 정수리 위에 솟아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백호는 미간에 있는 털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자생적으로 원시청정의 대공성 속에 현존하는.. 큰 공덕자량을 말한다...

이것은 보석에 비유될 수 있다..
다이아몬드가 크든 작든...다이아몬드의 본질적인 가치는 그 자체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모든 공덕의 보고는 외적인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의 태양이 빛날 때.. 그 빛은 잠부디빠(남섬부주)를 두루 비춘다..
태양은...자신이 대지를 비추려고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양이 하늘에서 빛나면... 그 빛은 저절로 땅을 비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원시청정의 대공성을 깨달으면...
부처의 모든 신체와 지혜가 저절로 완성되고 완전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지금 이순간...마음의 본성 속에 있다...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이 원시청정의 대공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무지라 한다...
그러한 무지는 팔만사천 번뇌의 뿌리이다..


족첸에 따르면 두 가지 무지가 있다....
원초적인 무지... 관념적인 무지...
원초적인 무지란 무엇인가?
상사라의 근본무명은...원초적인 무지라 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무지는 원시청정의 대공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으면...원초적인 무지는 깨끗하게 벗겨질 것이다...

무지는 안개와 같아...뿌옇고 강한 냄새가 난다..
안개가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면...어디에도 그 모습이 남지 않게된다......
무명은 그와 똑같다...

다르마타(법성)란 무엇인가?
그것은 애초부터 내재된 본성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디에선가 구해와서.. 노련한 대장장이가 두들겨 만든 물건과 같은 것이 아니다...
불가해한 이 성품은...본래부터 완전하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유일한 차이는 이러한 성품을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에 있다...
근본에 있어서는.. 부처와 중생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중생은 미혹되어있고..부처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두조각의 금을 장신구를 만드는데 쓰고자 하는데...
하나는 불순물이 섞여있고..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불순물이 정련될때까지는.. 장신구로 인정받거나 쓸 수가 없다...
하지만..둘다 금은 금이다.


상사라와 니르바나의 현상적 본질은 유사하다...
원시청정은 공성의 측면이고...
랍잠은..상사라와 니르바나의 현상적 측면이다...
상사라와 니르바나 현상의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족첸에서...자재광이라 한다...
원시청정과 자재광은 서로 다르냐면.. 그렇지는 않다...
자재광의 본성은 원시청정이기 때문이다...

비롯된 바탕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몸과 지혜는  원시청정을 손상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원시청정의 공성은 광대한 법계의 초월적인 지혜이기에...
비롯된 바탕없이 존재하는 자재광의 특성들이... 원시청정의 대공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생적으로 거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제자에게 이것을 설명할 때....
현상적인 측면은 공성의 측면과 분별하여야 한다...
원시청정의 대공성의 관점에서는..  자재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야 한다...
자재광은 원시청정의 본질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자재광의 측면에서 바라 볼 때는..
원시청정의 대공성을 어디에서도 찾을 필요가 없다...